굳이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고국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새롭습니다. 인터넷에 이미 수많은 정보와 경험담이 있지만, 각자의 여정은 고유한 것이기에 제 경험이 최소한 어떤 분들께는 새로움, 더 나아가 작은 용기를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좌충우돌의 서막
20대 초반의 저에게 유럽은 단지 '그 무언가'였습니다. 대학 캠퍼스를 오가며 학점과 영어 성적, 소위 '스펙'이라 불리는 것들을 쌓는 데 몰두하던 저에게 해외는 먼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친구들이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를 떠날 때도 '그 시간에 학점을 더 올릴 수 있을 텐데, 그 비용이면 강남 영어학원을 다니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당시에도 안정적인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대기업 취업을 위한 준비, 혹은 대학원 진학을 위한 공부같은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험보다 위험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20대 중반의 어느 여름 방학, 우연한 기회로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선배의 권유로 짧은 유럽 여행을 계획했는데, 그것이 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꿀 줄은 몰랐습니다. 개찰구 없는 대중교통이라니... 신뢰자본이라는 것이 이렇게 존재하는거야? 승자독식과 사다리 걷어차기가 아닌 타인을 위한 선의를 오랜 제도로 만들어 놓는 것들도 곁눈질로라도 보니 신기했습니다. 일등이 아닌 사람도 존중받을 수 있고, 최고 성과자가 아닌 게 무시당할 일도 아니라는게 흥미로웠고, 나의 행복을 타인의 시선으로 재단하지 않으려는 문화도 충격적이었습니다. 또한 박물관에서 만난 과학의 역사, 철학자들이 걸었던 길, 전쟁과 평화의 흔적들은 단순한 관광 경험을 넘어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잿더미에서 고도성장을 압축적으로 경험한 한국과 달리, 수백 년에 걸쳐 천천히 발전하고 변화해온 유럽의 모습은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습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또 다른 렌즈를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호기로운 출발은 헛발질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저는 '덕국덕질'을 시작했습니다. 독일 문화, 역사, 언어에 관한 책을 찾아 읽었고, 영미권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문화권의 토양에서 학업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습니다. 그리고 1년 후, 박사과정 1년 차가 끝나갈 무렵 큰 고민 없이 독일행을 결정했습니다. 사실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때 제 마음을 움직인 한 선배의 조언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떠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몇 달간 독일어 공부와 연구 계획서 작성에 몰두했습니다. 다행히도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함부르크 대학의 한 교수님으로부터 박사과정 입학 확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알스터 호수와 거기에 비친 단정한 화려함은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입국 후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던 행정 절차가 지연되기 시작했고, 두 달 후 교수님은 돌연 짤막한 이메일과 함께 입학 절차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연구실 예산이 갑자기 줄어들었다", "다른 학생을 이미 선발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때 배운 교훈은 지금도 명심하고 있습니다: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자.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에서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왔는데, 이력서에 설명하기 어려운 공백이 생기는 것도 걱정이었고, 당장 생활비와 체류 자격도 문제였습니다. 더구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유로화 가치가 폭등하던 시기라 1유로가 2,000원에 육박했습니다. 제가 모아온 쌈짓돈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물질적인 어려움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심리적인 공황 '내 결정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무모하게 행동한 것이 어리석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이었겠지요. '이제 늦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뽑은 칼은 무라도 썰자는 심정으로 독일 전국의 대학에 있는 제 분야 교수님들께 연구 계획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은 한국과 달리 박사과정 입시가 없어 개별 교수님들과 직접 연락하고 인터뷰를 진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대부분 교수님들은 답장조차 주지 않았고, 인터뷰까지 간 곳에서도 거절당했습니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만, 피드백을 요청했고 다행히 몇몇 교수님들은 성심성의껏 답변해 주셨습니다. 대부분의 피드백은 두 가지로 요약되었습니다:
"자기소개할 때 자신감이 부족했다."
"연구 계획서가 구체적이지 못하다.“
객관적으로 들으면 당연한 지적이었지만, 당시 저는 자존심이 크게 상했습니다. 이곳에서는 그저 '부족한 지원자'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우물안 개구리가 나를 위한 표현이었구나 싶었습니다.
이런 도전과 거절을 대략 50회 이상 반복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새로운 교수님을 찾고, 연구 계획서를 수정하고, 이메일을 보내는 일상이 반복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연구 계획서는 점점 더 구체적이 되었고, 자기소개에서도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좌충우돌의 시간이었지만 빠르게 독일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준 함부르크. 해외 생활을 시작하는 첫 도시는 제2의 고향이 된다. 넓게 트인 알스터 호수를 자전거로 한바퀴 돌고 오면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출처: Shutterstock)
좋은 일은 생각지도 못하게
독일 전역의 거의 모든 대학에 지원서를 보낸 듯했고, 6개월이 지나도 뚜렷한 성과가 없자 점차 체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대의 한 교수님께서 뜻밖의 초청 메일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연구실에서 20명의 교환학생을 대상으로 한 썸머 스쿨을 진행할 예정인데, 와서 2주간 강의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습니다. 연구실 구성원도 아닌 제게 강의를 맡긴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기회라고 생각하고 즉시 수락했습니다.
강의 준비를 위해 밤을 새우며 자료를 정리했고, 독일어와 영어를 번갈아 가며 연습했습니다. 첫날은 긴장으로 목소리가 떨렸지만, 이내 학생들의 호응을 느끼며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2주간의 썸머 스쿨이 끝나고, 교수님께서는 "너의 강의에 대해 좋은 피드백 외에는 들은 것이 없다"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제안이 이어졌습니다. 마침 기본 예산으로 강사 자리가 하나 비어 있으니 다음 학기부터 계약을 하고 동시에 박사과정 학생으로 받아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비슷한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는 고년차 박사과정 동료도 소개해주시면서 매끄럽게 연구실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습니다. 제가 원래 계획했던 시기와 방법은 아니었기에 당연한 것이 아닌 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대 연구실 동료들은 독일인은 왠지 차갑다는 선입견과 달리 세심하고 친절하게 도움을 주었다. (물론 이렇게 달라진 선입견은 외국인청에 가면 또 다시 뒤집힌다...)
불행이 열어주는 새로운 문
브라운슈바이크 공대에서의 생활은 바쁘고 충실했습니다.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며 박사 논문도 조금씩 진행했습니다. 교수님과 동료들도 호의적이었고, 독일 생활에도 점차 적응해 갔습니다. 이제 모든 어려움이 지나가고 순탄한 길이 펼쳐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이 또 다시 찾아왔습니다. 당시 계약은 연 단위로 갱신되는 형태였는데, 이듬해 대학 정책이 바뀌어 많은 강사들이 계약 연장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외국인 연구자들에게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었고, 저도 그 영향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펀딩이 없는 상태에서 박사과정을 지속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체류 비자도 문제였습니다. 지도교수님은 진심으로 미안해하셨고, 논문 지도는 계속해 주시겠다고 했지만, 재정적 지원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첫 번째 시련 때와 달랐습니다. 이미 한 번 무너졌다가 일어난 경험이 있었고, 독일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취업 사이트를 검색하고, 지인들에게 소개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주 우연한 기회에 당시 노키아 지도 사업부에서 올린 데이터 분석가 포지션을 발견했습니다. 제 연구 분야와 관련이 있었고, 기존에 하던 연구를 병행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지원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거쳐 결과적으로 합격했습니다.
이 회사는 현재 제가 몸담은 히어 테크놀로지스의 전신이기도 합니다. 운 좋게도 제가 연구하던 내용을 실무에 적용할 수 있었고, 지도교수님과도 계속 연락을 유지하며 논문 작업도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산업계에서 일하며 학계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실용적인 기술과 비즈니스 감각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짧게만 경험했던 직장생활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영 프로페셔널> 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저를 증명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국적이나 배경보다는 실력과 결과물로 평가받는 문화가 낯설기도 했지만, 점차 그 안에서 자신감을 찾아갔습니다.
모든 노력이 보상받지는 못하지만, 보상에는 이유가 있음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좋은 기회들도 찾아왔습니다. 재독과협(재독한국과학기술자협회)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다양한 분야의 선후배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학문적 교류는 물론, 독일에서의 생활에 대한 조언과 정서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꾸준히 노력했던 독일어, 독일 사회와 산업, 경제에 대한 관심 덕분에 한국의 여러 공공기관과 연구소에서 기술 정책 조사, 분석 등의 자문 의뢰를 꾸준히 받았고 지금도 활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과 독일·유럽의 교류에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점도 보람됩니다.
최근에는 한국의 여러 대학교에서 초빙받을 기회를 받아서, 온라인으로 정규 과목을 맡아서 진행하기도 합니다. 두 나라를 오가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제가 들인 노력에 상응하는 댓가인가 돌아보면 그렇지 않은 듯 합니다. 열심히 했고, 많은 시도와 노력이 있었을 뿐입니다. 노력의 대부분은 읽혀지지도 않고 쓰레기통으로 버려진 지원서 같은 것이었지만, 그 중에 어떤 것은 나중에 쓸모가 있었구나 늦게서야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녹록치 않지만 태도가 중요한 해외 생활
고국을 떠나 십수 년을 지낸 날들을 돌아보면, 실패는 가깝고 실체가 명확했으며, 실패하지 않는 삶은 그저 멀고 막연해 보였습니다. 괴로움이 좀 지나간 듯하면 지루했고, 그 사이사이를 메워주는 행복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독일의 가을과 겨울은 음습하고 우울하고, 여름은 반짝 좋았지만 햇살이 너무 강해 선글라스 없이는 나갈 수 없었습니다. 독일 친구들과 마시는 맥주는 맛있었지만,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하는 왁자지껄한 수다와 정겨움을 대체할 수는 없었습니다. 버터와 치즈를 듬뿍 바른 빵도 맛있었지만, 김치찌개나 매콤한 라면 없이 오래 버티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한국을 떠난 삶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삶을 대하는 제 자세의 문제였습니다.
종종 혼자서 되묻곤 합니다.
"그냥 독일에 나오지 않고, 한국에서 취업을 하거나 학교로 돌아갔으면 어땠을까?"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삶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어떤 선택은 좋은 것이고 다른 선택은 나쁜 것이라고 함부로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다른 환경에서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고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평생 이루지 못한 소원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타인의 시선과 판단이 아닌, 제가 직접 선택하고 몸으로 부딪혀 경험한 것만이 진정으로 제 것이 되었습니다. 가보지 않은 다른 길도 좋았겠지만, 지금 걷고 있는 이 길도 충분히 의미 있고 감사한 여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식상해 보이지만 중요한 팁
- 계약서를 받기 전에 결정하지 말고, 계약서를 받으면 꼼꼼히 읽고 서명하자: 구두 약속이나 이메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큰 결정을 내리지 마세요.
- 조금 버거워도 현지어는 배우면 도움이 된다: 영어가 공식 언어가 아닌 나라에서는 현지어 능력이 필수입니다. 처음에는 회화부터 시작해서 점차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하면, 현지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 깊이가 달라집니다.
- 적극적으로 필요를 표현하자: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속담처럼, 가만히 있으면 누구도 나의 능력이나 필요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때로는 불편하더라도 자신의 필요와 목표를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하자: 학회, 사교모임, 취업 박람회 등 다양한 기회를 통해 인맥을 쌓으세요. 한국인들은 어디에서나 기본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자신감을 가져도 좋습니다.
- 일과 삶의 균형을 찾자: 새로운 환경에서는 일에만 집중하기 쉽지만, 취미활동이나 여행을 통해 정서적 안정을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현지 문화를 체험하고 즐기는 것이 적응에 도움이 됩니다.
맺으며
무엇보다 제 가슴을 크게 울렸던 그 한마디, "떠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는 말을 한번 더 떠올려 봅니다. 이곳에서 새로운 수많은 인연과 사건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가장 큰 만남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이 아니면 결코 만나볼 수 없었을 진정한 나와의 조우, 그리고 마냥 편안하고 순탄하기만 했다면 발견할 수 없었던 좋은 사람들의 소중함, 같은 것들이 그 말의 숨은 뜻이구나 이제야 알게 됩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이 고통과 권태를 오가는 시계추라고 했다는데,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는 분들은 그 중간 어딘가에서 발견하는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분들이라고 여깁니다. 보잘 것 없지만 짤막한 이야기가 안락한 고국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려는 모든 분들께 작은 응원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