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을 세우자
나는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고, 늘 해외에서 공부하며 지내길 꿈꿨다.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고등학교 3학년 때, 유학 시기를 대략적으로 가늠해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해외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영어권 국가는 학비가 부담되었고,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자국어로 수업을 진행해 당장 유학을 떠나는 것은 어려웠다. 게다가 나는 실전보다는 연습에 강한 스타일이라, 하루 만에 실력을 평가하는 시험보다는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하며 나를 보여줄 수 있는 대학원 과정이 더 적합하다고 느꼈다.
결국, 나는 한국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친 후 박사 과정은 벨기에에서 진행했다. 이 과정은 선배들에게도 많은 추천을 받았고, 나 역시 유학을 꿈꾸는 공대 후배들에게 권하는 길이기도 하다. 벨기에나 독일은 박사 과정에서 수업을 들을 필요 없이 오직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석사 과정을 거치며 연구 경험을 쌓고 오는 것이 큰 장점이 된다. 반면, 이곳의 석사 과정은 학사의 연장선 같은 느낌이며, 졸업이 상당히 어려운 편이다. 과목당 두 번 낙제 받으면 해당 국가에서는 그 과목을 다시 수강할 수 없는데, 만약 그것이 전공 과목이라면 정말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또한, 석사를 마치더라도 연구실 생활이 보통 6개월 정도로 짧아, 박사 과정에서 곧바로 독립적인 연구를 수행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연구 경험을 충분히 쌓은 후 박사 과정에 진학하는 것이 훨씬 유리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인맥의 중요성
한국에서는 인맥을 통해 사람을 뽑는 것이 불공정하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내가 있는 벨기에에서는 박사 과정 지원이나 취업에서 인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는 사람의 추천을 통해 채용하는 것이, 완전히 모르는 사람을 뽑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런 문화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아버지가 연구원으로 근무하셨는데, 해외 연구자들이 프로젝트 때문에 한국에 방문하면, 아버지는 자신의 돈과 시간을 들여 저녁을 대접하고 난타 공연을 보여주는 등 교류의 시간을 보내셨다. 대학생이었던 나도 몇 번 동행하며 자연스럽게 외국 연구자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고, 영어 연습 뿐만 아니라 해외 인맥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석사 과정이 끝나갈 무렵, 예전에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명함을 주고받았던 프랑스와 벨기에 연구소의 연구원들에게 연락을 했다. 박사 과정을 해외에서 하고 싶은데 혹시 추천해 줄 수 있냐며, 내가 쓴 논문과 연구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냈다. 놀랍게도 두 분 모두 하루 만에 답장을 줬다. 프랑스 연구원은 안타깝게도 코로나로 인해 연구소의 자금이 끊겨 올해는 학생을 모집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반면, 벨기에 연구원은 자신이 박사 과정을 했을 때의 지도교수가 현재 학생을 모집 중인데, 그 주제가 내 석사 연구 주제와 비슷하니 한 번 연락해 보라고 추천해 주었다.
바로 교수님께 메일을 보내자 일주일 만에 인터뷰가 잡혔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교수님께 미리 5분 정도의 프레젠테이션을 해도 되는지 여쭤보고, 석사 때의 연구 내용을 요약해 발표 자료를 만들었다. 영어 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전화 영어를 하루 3~4회씩 한 달간 집중적으로 진행했고, 예상 질문과 답변을 미리 정리해 달달 외웠다.
드디어 인터뷰 날,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발표했고, 교수님도 자신의 연구실과 진행 중인 프로젝트, 실험 기기 등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내 석사 연구 주제가 304L 스테인리스의 수소 취성이었는데, 교수님이 원하는 연구 주제가 같은 오스테나이트계 310S의 수소 취성이었기 때문에 매우 흥미로워하셨다. 그리고는 원한다면 여기서 박사 과정을 해도 좋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 순간이 믿기지 않아서 여러 번 다시 물어봤던 것 같다. 또, 나는 박사 과정 지도교수를 선택할 때 연구 실력 뿐만 아니라 인성과 성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기도했는데, 인터뷰를 하는 내내 교수님의 배려심 깊은 태도에 감동했다. 내가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 다시 질문할 때마다 교수님은 내가 원어민이 아니라 발음이 좋지 않아서 미안하다며 다시 천천히 설명해 주셨고, 내 발표를 보신 후에는 너라면 더 좋은 곳에도 충분히 지원할 수 있을 거라며, 선택의 폭을 넓혀보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 말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저는 꼭 교수님 밑에서 연구하고 싶습니다!” 라고 강하게 의사를 밝혔다. 그렇게 박사 과정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도 매우 만족하며 연구하고 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은 경우였다. 인맥을 통해 확실한 추천을 받았고, 연구 주제도 잘 맞았으며, 장학금까지 지원받아 비교적 수월하게 박사 과정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지만, 이런 길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솔직하게 적어 보았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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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투어
1년에 한번 랩실 전체가 소풍을 떠나는 소풍. 이번엔 디낭에 카약을 타러 갔다.
유학을 준비하는 이들에게-작은팁
나는 유학을 염두에 두고 석사 과정을 학-연협동연구생(학연생)으로 진행했다. 학연생이란 연구소에서 연구를 주로 하면서,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학위를 받는 과정을 의미한다. 나는 연세대학교와 표준과학연구원에서 학연생으로 석사를 했다.
학연생 과정에는 장단점이 명확하다. 단점이라면, 일반적인 대학 연구실과 달리 랩실 동기들 간의 결속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점이다. 지도박사님과 시간을 오래 보내기 때문에 지도교수님과 시간을 보내기 힘들기도 하고, 하지만 유학을 확고하게 목표로 하고 있다면, 장점들이 그 단점을 충분히 보완해 준다. 연구소의 장비 수준은 학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뛰어나며, 석사 과정에서 국가 프로젝트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은 큰 강점이다. 이런 경험들은 CV(이력서)에 강한 경쟁력을 더해주고, 무엇보다 해외 연구자들과의 인맥을 만들기에도 훨씬 유리하다. 내가 교수님께 석사과정동안 한 것을 발표했을 때 내가 사용한 장비와 실험양의 질에 대해 놀라셨었다. 이것은 연구소에서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 했을 것 같다.
또한, 유학이나 박사 과정 진학을 준비할 때 시간과 나이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나는 학부와 석사를 휴학 없이 빠르게 마쳤기에, 박사 과정을 시작하기 전 잠시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컨택을 시작한 시기는 11월이었고, 석사 졸업은 다음 해 2월, 박사 과정 입학은 그 후년 10월로 잡았다. 그 사이 약 1년의 공백이 있었는데, 그 시간을 활용해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6개월 동안 워킹홀리데이를 했다.
박사 과정은 영어로 진행되지만, 내가 입학한 UCLouvain이 프랑스어권 대학이었기 때문에 영어와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쉬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내 인생에서 손에 꼽힐 만큼 잘한 결정이었다. 연구를 계속 이어가려면, 쉬어야 할 때는 제대로 쉬고, 연구할 때는 몰입하는 균형이 중요하다. 유럽의 박사과정생들은 여름 휴가도 즐기고 크리스마스 휴가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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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벨기에 오기 전에 시간을 보냈던 캐나다. 너무 즐거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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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니콜라
벨기에는 아이들이 산타보다 성니콜라를 더 기다린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