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RC 서포터즈] 나의 유럽진출 경험담 – 박기민(체코/양자)

Kimin PARK

Quantum Technology

Researcher at Palacky University

체코행 결심: 프라하의 붉은 지붕 아래 꿈을 품다

대학생 시절, 2주간의 유럽 여행은 제 인생의 방향을 뜻밖에도 정해주는 경험이 되었습니다. 낡은 배낭 하나 짊어지고 낯선 도시들을 떠돌며, 눈에 담는 모든 풍경, 스치는 모든 문화가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었던 곳은 프라하였습니다. 붉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림 같은 도시 풍경, 카를교 위에서 바라본 블타바 강의 석양, 도시 전체를 감싸는 낭만적인 분위기는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서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프라하에 흠뻑 취해 도시를 걷다 문득, ‘이곳에서 연구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그때는 그저 막연한 동경이었지만, 유럽, 그리고 체코라는 나라에 대한 씨앗이 제 마음속에 심어진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체코에 대한 낭만적인 이미지는 대학 시절 읽었던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통해 더욱 깊어졌습니다.

프라하의 카를교와 프라하 성

서울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면서, 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세계를 탐구하는 ‘양자역학’이라는 학문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세상의 근본적인 원리를 밝히는 학문이라는 매력, 그리고 양자역학의 원리를 이용한 미래 기술의 무한한 가능성은 저를 과학자의 꿈으로 이끌었습니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에, 문득 프라하의 붉은 지붕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체코는 오랜 과학 기술 역사를 가진 나라이며, 특히 제가 관심 있는 양자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연구 그룹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해외 박사후 연구원 경험은 연구자로서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했고, 체코에서 연구 기회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낯선 올로모우츠로: 라딤 필립 교수님과의 만남

해외 박사후 연구원 경험은 연구자로서 역량을 키우고 발전시키는 데 필수적인 발판이라고 믿습니다. 새로운 연구 환경에서 세계적인 연구자들과 교류하고 협력하며, 최첨단 연구를 경험하는 것은 연구자로서 시야를 넓히고 독립적인 연구자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유럽은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환경과 풍부한 문화적 경험을 동시에 제공하며, 국제적인 연구 협력을 위한 기회 또한 풍부합니다. 체코는 한국 연구자들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지만, 양자 분야, 특히 빛을 이용한 양자 연구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숨겨진 과학 강국입니다. 체코는 14세기 카를 대학교 설립 이후 얀 후스, 요하네스 케플러, 베르나르트 볼차노, 그레고어 멘델, 야로슬라프 헤이로프스키 등 저명한 과학자들을 배출하며 학문적 전통을 이어왔고, 현대 과학기술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으며, 팔라츠키 대학교, 체코 공과대학교 등을 중심으로 양자 광학 및 양자 정보 처리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제가 체코에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박사과정 지도교수님이신 정현석 교수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교수님과 상담하던 중, 체코 팔라츠키 대학교의 라딤 필립 (Radim Filip) 교수님 연구실을 추천받았습니다. 이전에 학회에서 라딤 필립 교수님을 뵌 적이 있었는데, 짧은 만남이었지만 교수님의 연구 발표와 온화한 인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필립 교수님은 양자 분야, 특히 양자 정보를 처리하고 측정하는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석학이십니다. 교수님의 연구 분야를 자세히 알아보니, 특히 ‘비-가우시안 양자 자원’이라는 특별한 도구를 사용하여 양자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기술 연구가 제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겼습니다. 필립 교수님 연구실에 합류한다면, 제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미래 기술 연구를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라딤 필립 교수

여기가 올로모우츠: 시작된 도전, 열정적인 연구 생활

박사후 연구원 지원 절차는 예상외로 간단했습니다. 정현석 교수님의 추천과 함께, 제 연구 경력을 담은 CV와 추천서를 필립 교수님께 제출하는 것으로 모든 과정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복잡한 서류 준비나 어려운 면접 없이, CV 단 한 장으로 세계적인 연구실에서 연구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정말 놀랍고 행운이며, 정현석 교수님의 추천과 필립 교수님의 배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 진출을 꿈꾸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훌륭한 연구자들과의 관계 형성은 해외 진출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학문적인 교류를 통해 맺은 인연은 때로는 예상치 못한 놀라운 기회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2013년 2월, 저는 체코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인 팔라츠키 대학(Palacky University)이 위치한 올로모우츠(Olomouc)라는 조용한 대학 도시에서 박사후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프라하처럼 화려하거나 번잡하지는 않았지만, 학구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도시였습니다. 역사학자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이름을 딴 팔라츠키 대학은 무려 14세기에 설립된 체코 주요 대학 중 하나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선택한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새로운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렜습니다. 올로모우츠의 첫인상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도시였습니다. 오래된 건물과 돌길, 느릿하게 움직이는 트램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들었고, 저는 이곳에서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낯선 환경이었지만, 앞으로 펼쳐질 연구 생활에 대한 희망과 설렘을 안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올로모우츠 시청, 나와 아내가 결혼식을 올린 광장, 성 삼위일체 석주

설레는 마음으로 체코 올로모우츠에 도착하여 팔라츠키 대학교 광학과 라딤 필립 교수님 연구실에 합류했습니다.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였습니다. 다양한 국적의 연구자들이 서로 존중하며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서로 경청하며 함께 협력하며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은 제게 신선한 자극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필립 교수님은 박사후 연구원 기간 동안 저의 멘토가 되어 주셨고, ‘비-가우시안 양자 자원’을 활용하여 미래 양자 기술의 효율성을 높이는 연구를 지도해주셨습니다. 특히 빛을 이용한 실험 장치와 특별한 회로 시스템을 활용하여, 양자 정보 기술의 자원을 개발하고 성능을 분석하는 연구를 주도적으로 수행했습니다. 또한 페트르 마렉 (Petr Marek) 교수님과 함께 빛과 회로 시스템을 이용한 핵심 부품 개발에 대한 공동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필립 교수님의 체계적인 지도와 연구실 동료들의 열정적인 협력 덕분에, 저는 미래 기술의 핵심 분야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올로모우츠에서의 시간은 제 연구 인생에서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도전의 순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Faculty of Science Palacky university

어려움, 그리고 아내와의 만남

올로모우츠에서의 연구는 ‘비-가우시안 양자 자원’이라는 특별한 도구를 효율적으로 만들고 정밀하게 제어하는 심오한 분야에 집중되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저는 ‘비-가우시안 자원 엔지니어링’, ‘갇힌 이온 시스템’, ‘비-가우시안 계측’ 등 다양한 연구 주제를 탐구하며, 미래 기술의 핵심 원천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국제적인 협력을 통해 연구 역량을 키워나갔고, 팔라츠키 대학교는 연구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체코에서의 연구 생활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낯선 환경과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은 예상보다 어려웠고, 특히 건강이 악화되어 연구를 계속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쳐있던 시기였습니다. 외로움과 막막함이 밀려올 때도 많았습니다.

올로모우츠에서의 생활은 힘든 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도시 풍경과 여유로운 분위기는 제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기념비, 웅장한 성당 등 도시 곳곳에는 체코의 역사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가득했습니다. 공원과 정원은 연구로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휴식 공간이었습니다. 체코 맥주 축제, 크리스마스 마켓 등 체코 문화를 경험하며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올로모우츠에서는 다국적 동료들과 함께 연구하며, 서로의 문화를 배우고 끈끈한 우정을 쌓았습니다. 이들은 체코 생활에 빠르게 함께 적응해간 소중한 동료입니다.

무엇보다 올로모우츠는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된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해준 곳입니다. 건강 악화로 연구를 포기할까 고민하던 힘든 시기에, 온라인 펜팔을 통해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체코어를 배우고 싶어 시작했던 펜팔이었지만, 체코와 한국 문화와 언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며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깊이 의지하게 되었고, 올로모우츠에서 직접 만나 사랑을 키워나갔습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 덕분에, 저는 다시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고, 건강도 점차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체코는 저에게 연구자로서 성장할 기회를 준 곳일 뿐만 아니라, 삶의 동반자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해준 제2의 고향과 같은 소중한 곳입니다.

 

덴마크로의 도전: 새로운 도전, 가족과의 행복

2018년, 저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라딤 필립 교수님의 추천으로 덴마크 공과대학교 (DTU) 로 연구 무대를 옮겼습니다. 체코에서 빛을 이용한 양자 연구 이론을 깊이 있게 연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양자 기술을 실제로 구현하고 실험하는 연구로 확장해보고 싶었습니다. 덴마크는 양자 컴퓨터 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선두 국가이며, DTU는 이 분야 최고 연구 기관 중 하나입니다. 저는 DTU 물리학과 ‘거시적 양자 상태 센터’ 울릭 앤더슨 (Ulrik L. Andersen) 교수님 연구실에 합류하여 양자 컴퓨터 연구라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었습니다. 덴마크 DTU에서의 연구는 양자 컴퓨터 분야의 최첨단 기술을 직접 경험하고, 세계적인 연구자들과 함께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DTU BigQ그룹 (오른쪽 아래가 울릭 앤더슨 교수님)

덴마크에서의 생활은 연구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잊지 못할 행복한 추억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코펜하겐 근처의 병원에서 아내가 딸을 출산했고, 덴마크는 저희 가족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 되었습니다. 주말마다 가족과 함께 덴마크의 아름다운 바닷가를 거닐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덴마크의 아름다운 자연과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가족과 함께 했던 시간들은 제 삶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있습니다. 덴마크에서의 마지막 몇개월은 코로나로 인해 좀 더 가족들과 덴마크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항상 산책하던 호수에서 딸과

다시, 올로모우츠로: 더 큰 꿈을 향한 도전, 그리고 미래

2020년, 저는 오랜 계획대로 다시 올로모우츠로 돌아왔습니다. 덴마크에서의 2년간의 연구 생활은 값진 경험이었지만, 체코에서의 연구 환경과 올로모우츠라는 도시에 대한 깊은 애정이 더욱 컸습니다. 저는 팔라츠키 대학교 광학과 선임 연구원으로 돌아와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비-가우시안 양자 자원’을 활용한 양자 정보 처리 기술 연구를 심화시키면서, 갇힌 이온, 양자 계측 등 다양한 분야로 연구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2024년 1월부터는 팔라츠키 대학교 tenure track 선임 연구원으로 임용되고 현재 우니초프라는 곳에서 집을 구해 그사이 태어난 아들과 함께, 더욱 안정적인 연구 환경에서 제가 꿈꿔왔던 연구를 마음껏 펼쳐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루카스 슬로디츠카 박사의 연구팀과 갇힌 이온 기반 양자 기술 연구를,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이본 가오 교수님 그룹과는 양자 계측 분야의 국제 공동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박사 과정 학생들을 지도하며 차세대 양자 기술 연구 인력 양성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2013년 체코에서의 박사후 연구원 생활은 제 연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라딤 필립 교수님의 따뜻한 지도 아래 양자 연구에 몰입하면서, 연구자로서 탄탄한 기초를 다지고 독립적인 연구 역량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체코와 덴마크에서의 값진 경험은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를 경험하고, 세계적인 연구자들과 협력하며 국제적인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앞으로도 양자 분야, 특히 양자 정보 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의미 있는 연구 성과를 꾸준히 만들어내고, 미래 사회를 바꿀 차세대 양자 기술 발전에 기여하는 연구자가 되려고 합니다. 제 경험이 해외 진출을 꿈꾸는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유럽, 특히 체코는 양자 연구를 포함한 과학 분야에서 훌륭한 연구 환경과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하는 매력적인 곳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도전하면 새로운 가능성과 빛나는 성장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Print Friendly, PDF & Email

More To Expl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