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혹은 취업?
석사 생활이 거의 마무리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친구들은 하나 둘씩 다음 진로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고 있었다. 박사과정에 진학하겠다는 친구들 반, 취업하겠다는 친구들 반 정도였다.
사실 나는 석사논문을 쓰고 있는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졸업할 때쯤 자리가 나지 않았다. 교수님께서는 1년만 기다려 보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셨지만, 왠지 나의 프로필을 매력적으로 보고 계시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스위스에서 학위를 받으면 6개월간의 구직 비자가 주어지는데, 이 기간 안에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스위스를 떠나야 한다. 기본적으로 한국인은 non-EU이기 때문에 취업비자를 받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회사 측에서 정부에 ‘유럽인이 아닌 이 사람을 꼭 뽑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위스에 거주한 지 2년 반쯤 되었던 그 시점에, 나는 ‘지금 스위스를 떠나는 것은 여러모로 너무 아쉽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갖은 고생을 해 가며 어렵게 받은 학위인데, 지금 떠나게 된다면 스위스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될 것 같았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우선은 취업을 목표로 해 보자 라고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유럽과 미국 등 서양 국가에서는 ‘링크드인’의 활용이 정말 흔하다. 한국의 ‘사람인’ 또는 ‘잡코리아’ 등과 비슷한 구직 사이트인데, 자신의 커리어 관련 프로필을 관리할 수 있다. 이곳에서 채용공고가 올라올 때마다 들어가서 나의 이력과 잘 맞는지 확인하고,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으면 지원을 했다.
유럽에서 구직을 해 본 경험에 의해 줄 수 있는 팁이 있다면, Cover letter를 꼭 작성하라는 것이다. 보통 1장짜리 resume 만 내는 경우가 많은데, 당연히 resume도 중요하지만 편지 형식의 cover letter에는 나만의 개인적인 회사에 대한 관심/동기를 어필할 수 있어 좋다. 좀더 친근하게 쓰인 편지 형식이라 그런지, 회사 쪽에서도 거의 대부분 확인하는 것 같았다. 나도 처음에는 resume 만 보내다가, 연락이 너무 안 오자 전략을 바꿔 cover letter를 추가했더니 연락이 오는 곳이 눈에 띄게 늘었던 경험이 있다. 물론 회사마다의 분야와 추구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조금씩 수정해서 사용하는 것을 권한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커리어 상담/매칭 서비스도 잘 활용하면 좋다. 취리히 공대의 경우 매년 커리어 이벤트가 열리며, 그때마다 내 프로필을 올려두면 연락이 오는 곳도 있었다. 최대한 다양한 경로로 회사들과의 접점을 찾는 것을 추천한다. 유럽은 네트워킹도 상당히 중요하기 떄문에, 회사에서 설명회 같은 것을 할 때 인사담당자를 잘 살피고 링크드인 친구 추가를 한다거나, 연락처를 알아두면 좋다.
결정적으로 내가 합격 통보를 받은 곳은 현재 재직중인 회사인 ‘RAAAM Memory Technologies’라는 회사인데, 메모리 IP 반도체 설계 스타트업이다. 아직 작은 규모이지만 최근 시리즈 A 투자를 받아 상당히 주목받고 있고, 스위스 로잔 공대(EPFL) 교수님과 박사후 연구원이 10년간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세운 회사이기 때문에 다른 스타트업에 비해 안정적인 기술을 갖고 있다. 스위스에는 이러한 스핀-오프(spin-off)형식의 스타트업 회사가 많다. 취리히의 경우 AI / 컴퓨터공학 / 소프트웨어 / 금융 분야의 회사가 많고, 로잔의 경우 바이오 / 전자 산업이 발달되어 있다. 유명한 마우스 기업 logitech도 로잔공대에서 탄생한 기업이다. 내가 합격한 회사 또한 로잔공대의 스핀오프 회사여서 로잔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