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unjung Hwang
Semiconductor and Display
Researcher at RAAAM Memory Technologies
스위스 취리히에 석사생으로 입학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외국 생활에 대해 궁금해하던 아이였다. 해외에서 사는 건 어떤 느낌일지, 해외에서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하는 것은 한국에서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지 너무도 궁금했다. 그래서 청소년기 때 막무가내로 유학을 보내 달라고 부모님께 조르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평범한 한국의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대학에 진학했다. 여전히 해외생활에 대한 궁금함은 남은 채로.
대학교 때는 교환학생 제도를 활용하여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해외에서의 학교생활을 체험해 볼 수 있었다. 당시 갔던 곳은 오스트리아였는데,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여행을 다니기가 참 좋았다. 그때의 좋은 기억과 함께, 자연스럽게 유럽에서 유학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키워왔던 것 같다. 유럽에 있는 학교들을 찾아보던 중, 취리히 공대(ETH) 가 눈에 들어왔다. 전 세계에서 6순위로 평가받는 명문대였고, 학생들의 연구에 아낌없는 지원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학교 홈페이지에서 본 돔 형태의 웅장한 캠퍼스 건물은 그곳에서의 유학 생활을 간절히 꿈꾸게 했다.
이곳에 석사과정 유학을 가기로 결심하고 남은 학부 성적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유학 준비에 들어갈 무렵, 코로나가 찾아왔다. 당시 분위기가 매우 안 좋았기 때문에 합격한다고 하더라도 유학을 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우선은 붙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최대한 열심히 서류를 준비했다.
취리히 공대는 입학하고자 하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많은 서류를 요구하는데, 그 중 어학 성적으로는 TOEFL 100점 이상, GRE 점수 제출이 조건이었다. 대부분의 유럽 학교들은 GRE를 보지 않는 데 반해 취리히 공대는 명시적으로 GRE 성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준비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코로나 상황이라 모든 수업이 재택임을 활용하여 공강 시간에 학원을 오가며 틈틈히 공부했다. 두 번의 GRE 응시 끝에 나름 만족스러운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추천서는 2장이 필요하며, 내 경우 관심분야의 전공과목 성적을 잘 주신 교수님과 연구실에서 인턴을 했을 때의 담당 교수님께 연락을 드렸다. 그리고 motivation letter도 필요한데, 내가 왜 해당 학교의 해당 학과에 입학하고자 하는지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작성해야 한다. 한 가지 팁을 주자면, 최대한 자세하게 작성하면 좋게 봐주는 것 같다. 단순히 ‘이 학과에 입학하고 싶다'가 아니라, ‘이 학과의 이 연구실에서 어떤 연구를 어떤 식으로 진행해 보고 싶다’ 같이 구체적인 동기를 작성하면 좋다. 분량은 아주 길 필요는 없으며 진정성 있는 어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유럽은 대부분 이런 형식의 레터를 요구하니 참고하면 좋겠다.
약 두 달 반이 걸려 취리히 공대 전자전기공학과 합격 발표를 받았을 때는 정말 뛸 듯이 기뻤던 것 같다. 다행히 그해 들어 코로나도 점점 나아지고 있었고, 놓치기에 너무도 아쉬운 기회라고 생각되어 유학길에 오르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취리히에서의 석사 생활
취리히 공대에서의 첫 학기는 꽤나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럽 석사과정은 보통 1년 수업 이수 + 1년 프로젝트 및 논문 작업으로 진행된다. 수업이 모두 영어로 진행되는 것은 그렇다 쳐도, 한국에서의 수업과는 꽤나 다른 형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유럽의 대부분의 학교들에서는 출석 점수는 반영이 되지 않으며, 오로지 시험으로만 성적을 낸다. 그러므로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수업에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물론 시험을 잘 보려면 실습 시간에 참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시험도 중간고사/기말고사 두 번이 아닌 학기말의 단 한번의 시험으로 점수가 결정나기 때문에, 시험기간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또한 어떤 방식으로 문제가 나올 지 모르니 갑갑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처럼 외워서 푸는 문제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개념을 응용할 줄 알아야 하며, 찬찬히 생각해 보아야 풀리는 문제가 많다. 이런 차이 때문에 첫 학기에는 6과목의 시험 중 2과목을 fail하기도 했다. 정말 철저히 준비했는데, 너무도 낮은 점수가 나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두 번째 학기부터는 시험 유형에 좀더 익숙해지고 공부 방법을 바꾸어 조금 더 나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첫 학기의 충격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프로젝트 및 논문 참여가 가장 의미 있었는데, 취리히 공대는 학생들에게 정말 다양한 기회를 제공한다. 본인이 원하는 연구실에 찾아가 자유롭게 연구생으로 일할 수 있고, 선택의 폭도 매우 넓다. 내 경우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미 원하는 연구실이 있어 그곳에서 프로젝트와 논문을 매우 마쳤지만, 어떤 친구들은 두 번의 프로젝트와 논문 작성을 모두 다른 곳에서 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다.
그리고 두 번째 학기부터는 조교나 인턴 등의 용돈벌이가 가능한 일자리(주 15시간 이내)도 구할 수 있다. 학교 홈페이지에 정기적으로 올라오니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나 역시 회로설계 분야의 한 교수님께서 연구원 조교를 모집하는 글을 보고 찾아가 8개월 정도 일한 경험이 있다. 스위스는 학생 시급이 꽤나 높기 때문에, 잘 활용하면 금전적인 부분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매주 미팅하던 회의실과 연구실 밖에서 바라보던 풍경. Biomedical 연구실이라 자연친화적인 분위기로 꾸며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박사 혹은 취업?
석사 생활이 거의 마무리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친구들은 하나 둘씩 다음 진로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고 있었다. 박사과정에 진학하겠다는 친구들 반, 취업하겠다는 친구들 반 정도였다.
사실 나는 석사논문을 쓰고 있는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졸업할 때쯤 자리가 나지 않았다. 교수님께서는 1년만 기다려 보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셨지만, 왠지 나의 프로필을 매력적으로 보고 계시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스위스에서 학위를 받으면 6개월간의 구직 비자가 주어지는데, 이 기간 안에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스위스를 떠나야 한다. 기본적으로 한국인은 non-EU이기 때문에 취업비자를 받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회사 측에서 정부에 ‘유럽인이 아닌 이 사람을 꼭 뽑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위스에 거주한 지 2년 반쯤 되었던 그 시점에, 나는 ‘지금 스위스를 떠나는 것은 여러모로 너무 아쉽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갖은 고생을 해 가며 어렵게 받은 학위인데, 지금 떠나게 된다면 스위스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될 것 같았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우선은 취업을 목표로 해 보자 라고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유럽과 미국 등 서양 국가에서는 ‘링크드인’의 활용이 정말 흔하다. 한국의 ‘사람인’ 또는 ‘잡코리아’ 등과 비슷한 구직 사이트인데, 자신의 커리어 관련 프로필을 관리할 수 있다. 이곳에서 채용공고가 올라올 때마다 들어가서 나의 이력과 잘 맞는지 확인하고,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으면 지원을 했다.
유럽에서 구직을 해 본 경험에 의해 줄 수 있는 팁이 있다면, Cover letter를 꼭 작성하라는 것이다. 보통 1장짜리 resume 만 내는 경우가 많은데, 당연히 resume도 중요하지만 편지 형식의 cover letter에는 나만의 개인적인 회사에 대한 관심/동기를 어필할 수 있어 좋다. 좀더 친근하게 쓰인 편지 형식이라 그런지, 회사 쪽에서도 거의 대부분 확인하는 것 같았다. 나도 처음에는 resume 만 보내다가, 연락이 너무 안 오자 전략을 바꿔 cover letter를 추가했더니 연락이 오는 곳이 눈에 띄게 늘었던 경험이 있다. 물론 회사마다의 분야와 추구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조금씩 수정해서 사용하는 것을 권한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커리어 상담/매칭 서비스도 잘 활용하면 좋다. 취리히 공대의 경우 매년 커리어 이벤트가 열리며, 그때마다 내 프로필을 올려두면 연락이 오는 곳도 있었다. 최대한 다양한 경로로 회사들과의 접점을 찾는 것을 추천한다. 유럽은 네트워킹도 상당히 중요하기 떄문에, 회사에서 설명회 같은 것을 할 때 인사담당자를 잘 살피고 링크드인 친구 추가를 한다거나, 연락처를 알아두면 좋다.
결정적으로 내가 합격 통보를 받은 곳은 현재 재직중인 회사인 ‘RAAAM Memory Technologies’라는 회사인데, 메모리 IP 반도체 설계 스타트업이다. 아직 작은 규모이지만 최근 시리즈 A 투자를 받아 상당히 주목받고 있고, 스위스 로잔 공대(EPFL) 교수님과 박사후 연구원이 10년간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세운 회사이기 때문에 다른 스타트업에 비해 안정적인 기술을 갖고 있다. 스위스에는 이러한 스핀-오프(spin-off)형식의 스타트업 회사가 많다. 취리히의 경우 AI / 컴퓨터공학 / 소프트웨어 / 금융 분야의 회사가 많고, 로잔의 경우 바이오 / 전자 산업이 발달되어 있다. 유명한 마우스 기업 logitech도 로잔공대에서 탄생한 기업이다. 내가 합격한 회사 또한 로잔공대의 스핀오프 회사여서 로잔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스위스 로잔에서의 취업
우여곡절 끝에 취업에 성공했고, 본격 이사 준비를 해야 했다. 우선 임시로 살 집을 구하러 취리히-로잔을 몇 번 왕복했다. 로잔은 취리히보다 집 구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도시 규모에 비해 학생 수가 많아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3개월간 임시 거주지에 머물면서 집을 구하러 다녔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참고로 스위스에서는 집을 구할 때 내가 집을 찾아다녀야 한다. 보통 공고가 올라오는 웹사이트 몇 개를 보고 발품을 팔아 직접 집을 보러 다녀야 하는데, 한 번에 지원자가 꽤 많기 때문에 경쟁률이 100:1인 경우도 흔하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조건에 원하는 집을 구하기란 정말 하늘의 별 따기다. 스위스에 올 계획이신 분들은 주거 문제에 대해 각오하고 오시기를 바란다.
나 또한 장장 두달 반을 돌아다녀 겨우 나를 받아주는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로잔에 오고 첫 3개월은 일에 적응하고 집을 구하느라 정신 없었지만, 그 이후에는 학생 때보다 훨씬 안정적인 급여를 받으며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석사 때 주로 했던 연구는 아날로그/mixed-signal 회로설계였는데, 그와 비슷한 류의 업무를 맡아 비교적 수월하게 일에 적응할 수 있었다. 다행히 회사에서의 공용어 역시 영어여서 언어 소통에도 문제가 없었다. 다만 로잔은 불어권이고 취리히보다 작은 규모의 도시이기 때문에 현지 생활할 때는 불어를 하지 못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다.
취리히와 로잔의 가장 큰 차이점은 첫 번째로 언어, 두 번째로 도시의 규모, 세 번째로 문화가 있다. 두 도시는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만큼 사람들의 사고방식 및 생활 패턴도 다르다고 느낀다. 취리히는 독일어권인 만큼 좀더 보수적이고 규칙적인 데 반해, 로잔의 경우 좀더 다양한 인종이 섞여있으며 자유롭고 여유로운 느낌이다. 물가는 로잔이 좀 더 싼 편이다. 같은 스위스에 있지만 두 도시는 상당히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에, 장기 거주를 고려한다면 두 도시를 모두 가보고 차이를 느껴보기를 권한다.
개인적으로 로잔에 처음 이사를 왔을 때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과 불어를 하지 못한다는 점, 취리히보다 소도시라는 점 때문에 이사 가는 것을 딱히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들도 하나 둘 생기고 불어를 배우는 지금은 로잔이 살기 좋은 도시라고 생각한다. 취리히보다 여유가 있고, 다양성이 조금 더 존중되는 느낌이다. 아름다운 산과 호수 등 자연과도 가깝다. 지금은 나름 로잔 생활에 많이 익숙해졌다.
로잔 근처에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보며 하이킹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많다.
취업 2년 차, 스위스에서 꿈꾸는 미래
얼마 전 현 회사에 취업한 지 만으로 2년이 되었다. 처음 스위스에 발을 내딛었을 때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안해졌다. 모든 것이 새롭고 불확실하던 학생 시절, 시험 점수에 전전긍긍하며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졸업 후 사회에 나와보니 그게 전혀 다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산업과 일자리가 있으며, 그 중 어딘가에는 내 자리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이곳에서 유럽인이 아닌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은 말했다. 스위스에서 비유럽인이 취업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사실 맞다. 나 역시 그 말들에 겁을 먹고 과연 취업이 될지 걱정에 잠 못 드는 날도 많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나를 뽑아주는 곳에 와서 벌써 2년 넘게 일하고 있고 올해 영주권 신청을 앞두고 있다. 실제로 이곳에서 취업비자를 받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나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회사가 있다면 비자 문제는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회사 생활에 만족하는 이유는 자유로운 근무 환경과 휴가 일수, 충분히 배울 기회 등이 있다(회사 생활 관련해서는 소속 기관 소개글에 자세히 적어두었다). 스위스 생활에 만족하는 이유로는 아름다운 자연 환경, 눈치 보지 않고 여유로운 분위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 등이 있다. 단점 또한 당연히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스위스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글을 마치며
스위스 혹은 유럽에서의 유학 또는 취업에 관심이 있다면, 도전해 보기를 진심으로 권한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이곳에서의 경험은 어디서도 쉽게 하기 어려운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며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고, 연구를 목적으로 온다면 스위스의 연구 환경은 단연 최고이다. 그러나 그 전에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과정이 중요할 것 같다. 해외생활이 쉬운 길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알고 어떤 미래를 꿈꾸는지 충분히 생각한 후 결정한다면, 어디에서 생활하던지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