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l Ah PARK
Advanced Biotechnology
Postdoc at Slovak University of Technology in Bratislava
유럽 진출 동기
계산물리(응집물질물리)로 석사를 마쳤으나, 박사과정 중 연구 방향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단순히 학문적 만족을 넘어 실생활과 연결된, 특히 생물 및 의료 분야에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연구를 하고 싶었다. 동 대학원에서 생물물리로 박사를 시작했으나 여러 문제로 순탄치 않았고, 박사를 다시 시작하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해외 학회 참석을 통해 방문했던 유럽의 연구 환경이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었다. 특히 유럽 연구자들과의 소통 경험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유럽은 각 나라가 서로 가까이 위치해 있어 다양한 관점과 분야의 연구자들이 물리적으로 만나 협업하기에 용이하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그러던 중 Marie-Curie ITN(Innovative Training Networks)이라는 유럽의 대규모 박사과정 트레이닝 펀드를 알게 되었고, 그중 ImageInLife라는 프로젝트를 발견했다.
ImageInLife는 Horizon 2020 Marie Skłodowska-Curie European Training Network로, 생물학적 이미징 기술과 수학적 분석을 결합하여 척추동물의 발생 및 질병을 연구하는 다학제 프로젝트였다. 유럽 내 여러 국가의 생물학, 공학, 물리학, 응용수학 분야 기관과 기업들이 함께 참여했다.
당시 Prof. Karol Mikula(Slovak University of Technology in Bratislava)가 생물학 이미지를 수학적 모델로 처리하는 분야에서 학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계산물리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적으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실제 데이터로 작업하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협업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했다. 교수에게 CV와 research statement를 첨부하여 지원 메일을 보냈고, 온라인 미팅을 통해 연구 계획을 논의했다. 다행히 합격 통보를 받았고, 비자 발급을 위해 슬로바키아를 직접 방문하여 절차를 진행한 후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ImageInLife 활동
프로젝트에 합류했을 때 다른 학생들보다 반년 정도 늦은 상태였다. 이미 서로 친해진 학생들 사이에서 분위기를 파악하며 녹아 드는 데 처음에는 어색함이 있었지만, 다들 친절하게 맞아주어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각 기관의 supervisor 지도하에 개별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프로젝트 내 다른 팀과의 협업을 적극 권장한다. 이를 위해 1년에 한 두 번씩 전체 학생들이 모여 진행 상황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연례 미팅이 있었다(그림 1, 2). 또한 공통 주제로 학회에 참석하여 심포지엄을 구성하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outreach activity도 진행했다(그림 3).
박사과정 학생의 훈련에 중점을 두는 프로젝트 답게, 각 분야 전문가를 초청한 강의와 soft skill 교육도 제공되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최소 한 달 이상 2-3개의 다른 기관에서 방문연구(secondment)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두 차례의 secondment를 진행했다. Leiden University, Netherlands의 Prof. Annemarie MEIJER 팀(그림 4)과 CNRS, Gif-sur-Yvette, France의 Dr. Nadine PEYRIERAS 팀(그림 5)에서 각각 연구했다. 방문 기간 동안 나의 연구를 발표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협업 가능성을 모색하는 매우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한 달 정도 머물면서 해당 기관의 박사과정 학생들과 일상을 함께하며, 박사과정의 어려움과 즐거움을 나누는 것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림 1 ImageInLife 연례 미팅, 브라티슬라바, 슬로바키아 (2019년 2월)
그림 2 ImageInLife 미팅 후 lab visit, 하이델베르크, 독일 (2019년 9월)
그림 3 European Researchers’ Night에서 ImageInLife 프로젝트 부스 활동 (2019년 9월)
그림 4 Leiden University, Netherlands에서의 secondment
그림 5 CNRS, Gif-sur-Yvette, France에서의 secondment (In memory of Svetlana)
브라티슬라바에서의 연구 생활
연구 환경 적응
연구 환경은 어느 곳이든 지도교수의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나의 지도교수는 정기적인 랩미팅보다는 오피스를 방문하여 연구 상태를 보고하고 토론하는 캐주얼한 방식을 선호했다. 물리학 배경을 가진 내가 응용수학 그룹과 함께 일하면서 사고방식의 차이를 경험했다. 나는 현상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모델을 세우는 접근에 익숙했던 반면, 응용수학 연구자들은 모델을 더 엄밀하게 푸는 데 훈련되어 있었다. 컴퓨터 코딩과 결과 분석이라는 기술적 측면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 철학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도교수는 이 과정을 기다려주었고, 나의 관점에서 문제를 푸는 것을 인정하면서 수학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다. 이 경험을 통해 더 엄밀하고 computationally intensive한 기술을 갖추게 되어 많은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연구 방식 외에도 인상적이었던 점은,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몸이 좋지 않을 때 무리하기보다는 충분히 쉬고 돌아오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번아웃 없이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과 프로젝트 확장
ImageInLife 관련 행사 참여와 secondment로 바쁜 시간을 보내던 중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컴퓨터만 있으면 되는 연구라 업무적으로는 큰 타격이 없었다. 외출이 거의 금지되어 멘탈 관리가 필요했지만, 한국인 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무사히 팬데믹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학교 출근이 가능해진 이후에는 논문 작성과 미뤄졌던 학회 참석으로 다시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지도교수로부터 함께 진행한 연구를 기반으로 또 다른 ITN 프로젝트(Inflanet)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ImageInLife에서 다른 팀들과 토론하던 중, 생물학자들이 대식세포라는 면역세포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 때문에 정량적 분석이 어렵다는 논의가 있었다. 이것이 나의 박사과정 주제가 되었고, 다행히 좋은 결과를 얻어 면역 관련 주제의 Inflanet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이 프로젝트로 이탈리아에서 온 박사과정 학생과 같은 오피스를 쓰게 되었고, 그는 가장 친한 연구자이자 외국인 친구 중 한 명이 되었다. 직접적으로는 이 프로젝트에 소속되지 않았지만 같은 주제로 연구하여 external로 한 번 더 secondment를 함께 진행했다. LPHI, CNRS, Montpellier, France의 Dr. Mai NGUYEN-CHI 팀에서였다.
박사 학위 취득
세 번째 secondment를 마치고 박사학위 논문 작업에 집중하여, 대략 4년 9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를 마치고 다음 단계에 대해 고민하던 중, 지도교수가 박사후연구원 포지션을 제안해주었고, 이어서 학교에 research staff로 고용되어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게 되었다.
일상생활과 재정
연구 외 시간에는 브라티슬라바의 외국인 모임에 참여하며 친구들을 사귀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 이후로는 친구들이 많이 떠나고 업무가 바빠져 소셜 활동이 줄어들었지만, 초기에는 활발하게 교류했다. 이곳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저렴하고 다양한 맥주 문화로, microbrewery가 많아 주말이나 퇴근 후 가볍게 즐기기 좋았다.
일부 외국인 동료들은 거리에서 불쾌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했지만, 다행히 나는 그런 경험이 없었다. 초기에는 비자 처리도 비교적 원활하게 진행되었으나,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행정 시스템이 과부하되어, 외국인 관련 절차에 상당한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 생활 면에서 또 하나의 어려움은 언어였다. 슬라브 계열 언어는 익히기가 쉽지 않았고, 결국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행히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했고, 마트 등에서는 번역기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다.
재정적으로는 Marie Curie ITN 프로젝트를 통해 월급을 받았기 때문에 일반 박사과정 학생들보다 많은 급여를 받았다. 혼자 생활하기에는 충분한 수준이었다. 또한 보통 외국인 학생들은 등록비를 내야 하지만, EU 프로젝트를 통해 입학한 학생이라 등록비도 면제되었다. EU 프로젝트가 종료된 후에는 국가 박사과정 지원금과 지도교수의 다른 펀드를 통해 남은 박사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졸업 후 몇 달간 박사 후 과정을 거친 뒤 research staff로 전환되면서 급여가 소폭 인상되었고, 추가 프로젝트 참여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
졸업 후의 도전
박사과정 동안은 지도교수의 지원과 프로젝트 구조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오히려 졸업 후 독자적인 연구자로서 활동하면서 더 많은 도전에 직면했다. 연구 역량을 키우고 독립적인 펀딩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개인 연구 펀드에 지원했다. 경쟁이 치열해 대부분 선정되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기회를 찾았고, 운 좋게 체코 공과대학의 마리퀴리 코펀드 프로젝트인 Crop fellowship에 선정되어 Medical Physics 그룹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다. 곧 브라티슬라바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지만, 좋은 지도교수, 동료들, 그리고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 타향살이를 원활하게 할 수 있었다.
마무리 말
한국인들에게 슬로바키아는 흔히 접하는 나라는 아니다. 특히 연구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 나도 박사과정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 나라의 위치조차 몰랐다. 직접 경험해보니 연구 환경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특별히 뛰어나다고 하기는 어렵고, 특히 2023년 정부 교체 이후에는 연구 투자 환경이 위축된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분위기는 나와 잘 맞았다. 가끔씩은 느릴 때도 있어서 답답하기는 하지만, 남의 눈치를 덜 보는 분위기가 편안했다. 또한, 유럽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과 소통한 것은 매우 가치 있는 경험이었다.
유럽에서 연구하며 느낀 가장 큰 장점은 지리적 근접성이다. EU로 묶여 있지만 각 나라마다 사람들의 성향과 사고방식이 다르다. 하지만 서로 가까이 위치해 있어 직접 만나 토론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으며, 결국 다양한 관점이 융합되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여전히 매력적이다.
만약 유럽에서 박사학위를 고려한다면, Marie Curie ITN 프로젝트로 시작하면 international capacity를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관심이 있다면 EURAXESS (https://euraxess.ec.europa.eu/)나 Marie Curie Actions 공식 사이트 (https://marie-sklodowska-curie-actions.ec.europa.eu/)에서 공고를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관심 분야와 맞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적극 추천한다. 나의 유럽 생활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