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RC 서포터즈] 나의 유럽진출 경험담 – 정해식(네덜란드/사이버보안)

Haeshik JEONG

Cyber Security

Researcher at FrieslandCampina

“IT도 아니고, OT는 뭐지?”

저는 15여 년간 IT 및 OT 분야의 ‘사이버보안'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정해식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쉽게 사용되는 ‘IT’와는 달리 ‘OT’라는 용어는 굉장히 생소롭게 느껴지실텐데요, OT는 산업 현장에서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프로세스를 자동화·제어·모니터링하는 기술을 의미합니다. 제조·에너지·교통·수처리·석유화학·조선·스마트시티 등 국가 핵심 인프라의 대부분이 OT 범주에 포함됩니다.

개인적으로 전 세계 40여 개국 이상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글로벌 무대로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2022년 마침내 제 꿈을 실현하고자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로 이민을 왔습니다.

많고 많은 나라 중 왜 하필 네덜란드?

유럽 국가들 중 상대적으로 인구나 면적이 작은 나라지만, 출장과 여행을 통해 이미 네덜란드의 매력에 빠져든 우리 가족에게 이 곳으로의 이민은 그리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다양한 산업 인프라, 강력한 노동자 보호 제도, 유연한 근무 환경을 갖추고 있어 워크-라이프 밸런스 충족은 물론 제 커리어를 확장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새로운 문화나 기술을 잘 받아들이는 포용력, 동네 시장에서 조차 현금 없이 모든 것을 결제할 수 있는 스마트 인프라, 유럽 전역을 손쉽게 누릴 수 있는 지리적 장점, 선진화된 국가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안전한 생활 환경, 아이들이 행복한 훌륭한 교육 인프라 등이 네덜란드를 선택한 중요한 요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언어’였습니다. 네덜란드는 자체 언어인 ‘더치어’가 있지만 영어권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영어 사용 능력을 갖춘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 곳에서 생활하는 데 있어 언어 장벽이 낮아 편리하지만 동시에 현지어 습득을 더디게 만드는 게으름을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하하

그래서... 네덜란드 생활 만족하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만족합니다. 네덜란드는 제게 ‘삶의 가치와 ‘시간’을 돌려준 나라’입니다.

한국에서의 저의 생활은 겉보기에 나쁘지 않았습니다. AI·디지털 시대의 핵심 영역 중 하나인 사이버보안, 그 중에서도 글로벌 시장에서는 막 주목받기 시작한 OT 사이버보안 분야에서 국내 시장을 선도해 가며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왕성하게 활동을 하던 제가 문득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간다고 하니, 크게 놀라는 주변인들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문득 ‘성과와 인적 네트워크 구축’이라는 빛 좋은 명분 아래 ‘현장-비즈니스-프로젝트-회식’ 사이클의 무한 굴레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른 출근과 늦은 귀가의 반복으로 가족 간의 대화나 하나 뿐인 아이가 커가는 모습 등은 스마트폰에서나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다릅니다. 회식이나 외식 대신 마트에서 장 본 재료로 제가 가족들을 위해 손수 식사를 준비하고, 출장 대신 가족과 인근 유럽 국가들을 여행합니다. 꺼지지 않는 한국의 밤거리를 대신해, 이제는 글로벌 이웃들과 다양한 문화를 공유하며 다양성의 가치를 더욱 깊이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던 학부모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딸의 성장을 실시간으로 본방사수 하고 있습니다. 친구 문제, 학교에서 오가는 수많은 소문들, 심지어 연애 상담까지... 하루종일 쫑알거리는 딸과 대화하다 보면 어느 순간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립니다.

반려동물 친화적인 문화 또한 인상적입니다. 레스토랑을 포함한 대부분의 상점들이 반려견 출입을 허용하고, 거리 곳곳에 마련된 반려동물 식수대를 볼 때면 이 지구는 인간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더불어 육아지원금·박물관·대중교통 등 아이 중심의 정책, 최고 수준의 고속도로와 초고속 인터넷, 100% 비접촉 결제 시스템 등 잘 갖춰진 인프라는 생활의 편리함을 크게 높여줍니다. 특히 제가 거주하는 헤이그는 다문화와 혁신이 공존하는 글로벌 도시로, 다양한 문화와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교류되는 특별한 환경을 제공합니다.

이렇게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제 인생 2막은 단순한 이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저와 제 가족 모두에게 깊은 만족과 새로운 가치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에서의 일상

여기도 아침이 가장 바쁜 건 한국이랑 똑같습니다. 물론 저만 빼고요.

아내는 출근 준비, 딸은 등교 준비, 그리고 저는 반려견 산책 준비라는 거대한 미션을 수행합니다. 엽서 같은 헤이그 풍경 속에서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기다리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따끈한 커피 한 잔과 노트북. 제 하루도 ‘출근’으로 시작하는 건 변함없지만, 출근길이 아주 많이 낭만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업무가 일찍 마무리되는 날에는 종종 네덜란드 축구 리그인 ‘에레디비시(Eredivisie)’ 경기를 보러 갑니다. 최근엔 페예노르트 팀에 우리나라 선수인 황인범 선수가 입단하여 애국심과 함께 관람을 하고 있고, 키 2m에 육박하는 현지 관중들의 남다른 스케일의 열정적인 응원 역시 흥미로운 볼거리입니다. 

학교에서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며 학부모 회의에 참여하는 아빠들을 흔히 볼 수 있고, 국제사법재판소, 국제형사재판소, 유럽경찰기구(Europol) 등이 위치한 ‘국제법의 수도’인 헤이그라는 도시에 특성에 맞게 상당수의 학부모가 국제기구 혹은 법조계 종사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최근에는 제가 사는 도시인 헤이그에서 ‘2025 나토 정상회의’가 개최되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VVIP들이 방문하여 온 도시가 마비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평소엔 절약의 아이콘이자 노잼의 아이콘인 네덜란드인들이 1년에 단 이틀, 고삐를 푸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4월의 킹스데이와 1월 1일 새해맞이. 마치 이 날만을 위해 에너지와 돈, 흥을 저축해둔 것 처럼 킹스데이에는 너도나도 운하에 보트를 띄우고 맥주 폭탄 파티를 벌입니다. 그리고 새해엔 집집마다 몇 백만 원어치 폭죽을 쏘아 올리며 하루 종일 동네를 전쟁터로 만들어버립니다. 덕분에 일년에 딱 이틀은 ‘노잼 민족’이라는 수식어가 쏙 들어갑니다.

앞으로의 계획

네덜란드는 제게 “일은 이렇게도 할 수 있다”라는 새로운 방식과, 진짜 워크라이프 밸런스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나라입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는 조급함보다는 긴 호흡을 가지고, 가족을 비롯한 소중한 이들과 삶의 본질적 가치를 나누고자 합니다. 동시에 커리어 측면에서는 IT/OT 사이버보안 분야에서 한층 더 깊이 있는 전문성을 쌓아가려 합니다. 나아가 유럽은 물론 글로벌 산업 전반에 걸쳐 보안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차세대 인재들과의 협업을 통해 저만의 커리어 로드맵을 한 칸 한 칸 완성해 나갈 계획입니다. 결국 제 목표는 단순히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성장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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