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RC 서포터즈] 나의 유럽진출 경험담 – 이보연(영국/AI)

Bo-yeun LEE

Artificial Intelligence

Lecturer at University of Exeter Business School

처음부터 해외 박사가 Plan A는 아니었다.

영국에서 디자인 석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서비스디자인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해외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Design researcher, User researcher, Service designer 등 포지션이 있는 곳이라면 채용공고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어디든 망설이지 않고 컨택했다. 덕분에 2016년 여름에는 호주와 홍콩에 오피스가 있는 서비스 디자인 기업에 일주일간 초대받아 클라이언트와 같이 디자인 스프린트 워크샵도 했고, 같은 해 겨울에는 서비스디자인을 통한 혁신으로 유명한 미국의 병원, 메이요 클리닉과도 인터뷰를 했지만 해외 취업은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1년 동안의 실패기간 동안 자존감은 낱낱이 깨졌고 지금 해외취업을 하고 싶어하는 건 내 욕심인가 싶기도 했다. 어쩌면 영어도 부족한 마당에 운이 좋아 해외취업에 성공하더라도, 막상 업무를 시작했을 때 동료들에게, 클라이언트에게 민폐만 끼치게 되는 건 아닌가 싶은 걱정도 들었다. 디자인 연구원으로 해외 기업에 취업을 하는 것과 박사과정을 통해 디자인을 연구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란 걸 잘 알지만 박사를 언젠가는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기에 플랜 B로 박사 포지션과 지원방법을 알아보고는 있던 차 였다. 단, 지원하는 박사의 조건은 두가지였는데, 첫째로 장학금을 주는 박사학위 일 것, 그리고 연구분야가 내 관심사와 같을 것이었다. 

장학금을 주는 디자인 박사 포지션이 있어?

관심 연구분야가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던 나는 사실 왠만한 디자인 연구는 다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디자인을 통한 사회 문제 해결부터, 디자인 정의 (Justice)에 대한 담론 연구 등 어느 연구 든 재미있게 들렸기 때문에 일단 장학금을 주는 디자인 박사과정 공고는 다 지원했던 것 같다. 어느 나라로 갈 것이냐 도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는데, 일단 박사를 시작하면 적어도 3-4년은 좋든 싫든 그 나라에 거주하면서 연구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나라 역시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이러한 이유로 호주나 뉴질랜드는 다른 나라들 이랑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제외했고, 이와 별개로 GRE를 보기 싫다는 단순한 이유로 미국 대학교 역시 제외가 되었다. 지원 당시 조금 찾아본 결과, 영국은 디자인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의 박사 장학금을 NON-UK/EU Citizen에게 주는 경우가 드문 것으로 알고 있었기때문에 영국은 제외하고 유럽에 있는 학비가 무료인 학교 위주로 알아보았다. 첫번째 지원했던 박사과정은 서류 합격 후 인터뷰에서 광탈했던 Service Design for Innovation Network (SDIN)이라는 서비스 디자인을 통해 서비스 혁신이 프로젝트의 목적인, 마리퀴리 (Marie Skłodowska-Curie Grant Agreement)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는 European Horizon 2020 Research and Innovation Programme의 한 꼭지에 있는 포지션이었다. 프로젝트는 크게 3개의 연구주제 (혁신을 위한 서비스디자인 프레임웤과 방법, 이해관계자 참여 증대를 위한 디자인, 서비스 시스템과 가치 네트워크를 디자인)로 구성되어 있으며 펀딩 기간 내에 각 연구 주제 당 3명 씩 총 9명의 디자인 박사생이 유럽 내 각 대학에 고용되어 각기 다른 주제의 연구를 진행하고, 유럽 서비스 산업과 학계에 기여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각 테마 별 3명의 박사생이 고용되어 전체 9개 연구 프로젝트 진행 (2016년 SDIN 홈페이지)

자괴감이 맨틀을 뚫고 지구의 핵을 치고 왔던 박사지원 광탈의 흑역사

박사생은 순차적으로 선발했는데, 내가 지원할 당시 (2016년 2월)에는 customer engagement/ co-creation에 대한 연구를 하고자 하는 박사생을 채용하던 차였다.  박사학위에 합격할 경우 독일 쾰른 대학교 (University of Cologne) 의 학교 직원으로 등록되고, 네덜란드 마스트리트 대학교  (Maastricht University)의 박사생이 되어, 마스트리트 대학교에 계신 교수님과 쾰른 대학교에 계신 교수님께 논문 지도를 받게 되는 형식이었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대학교는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면 학교의 직원으로 등록이 되기 때문에 월급을 받으며 학위를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연구 기간 동안 학비는 무료이며, 쾰른 대학교에서 월급을 받게 되는데, 당시 환율로 세금 제외 한화로 300만원 정도 받게 되는 감사한 기회였다. 지원 프로세스는 꽤나 간소했는데, 이력서, 포트폴리오, 추천서 2장, 학부, 석사 졸업 증명서와 Motivation Letter 였다. Motivation Letter는 2 페이지 내외라고 해서 최대한 간결하게, 하지만 흥미를 끌만하게 작성해야 했다. 

두페이지 분량의 motivation letter

작성하고 보니 총 6단락정도로 구성되었는데, 첫 단락에는 어느 포지션에 지원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었고, 두번째 단락은 나의 education/industry 백그라운드와 박사 진행 역량에 대한 내용, 세번째에는 연구주제에 왜 관심이 생겼는지 과거 경험을 바탕을 들어 설명하고, 해당 연구가 왜 중요한지 연구 배경에 대해 기존 연구를 뒷받침해서 설명했다. 네번째에는 연구 aim 과 objectives를 설명하고, 다섯 번째 단락에서 해당 objectives를 성취하기 위한 구체적인 연구방법들에 대해 나열했다. 마지막으로 연구를 통해 예상되는 academic/industry contribution에 대해 작성하고 인사말과 bibliography로 지원서를 마무리했다. 데드라인에 맞춰 모든 서류를 제출하고 몇 일 후 Skype Interview 가 잡혔는데, 해당 박사과정을 지도하실 교수님 두 분의(네덜란드와 독일) 참석 하에 진행이 되었다. 가장 핵심을 찔렀던 질문은 박사 연구를 어디에 퍼블리시할지에 대해 물어보셨는데, 나름 아는 저널들을 답하긴 했지만, 당시의 나는 Impact factor라던가 ABS (The Chartered Association of Business Schools) 에 대해 인지하고 있지 못했던 시기라 좋은 저널들에 대해 너무도 무지했었다. 또한 해당 연구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저널 페이퍼들을 읽어왔더라면 응당 알 수 있을 법했던 서비스디자인 저널들에 대해서도 무지했었다. 당연한 결과였겠 지만 이렇게 인터뷰를 말아먹고 광탈한 후 자괴감이 또 맨틀을 뚫고 내려가서 지구의 핵을 치고 돌아오는 경험을 했다. 

 

두번째 박사지원 흑역사는 같은 해 가을에 광탈했던 핀란드 알토 대학교 (AALTO UNIVERSITY) 였다. 알토대학교는 헬싱키에 있는 꽤나 유명한 디자인 대학으로, 박사로 갈만한 학교 순위안에 늘 들어있었다. 예외적인 박사 공고가 뜨는지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차에 디자인 대학에서 학비 무료에 월급이 지급되는 5개의 박사 포지션이 올라왔다. 2개는 Fine art 와 Fashion Design 분야라 내 관심주제와는 거리가 있었고 나머지 세개는 디자인 영역에 있는 주제였다. 지속가능성을 위한 디자인 박사 ‘Doctoral student position in Design for sustainability’, 디자인 주도의 공공분야 개발 박사 ‘Doctoral student position in practice-based research on Design Driven public-sector development’, 그리고 마지막이 당시에 어떻게 접근해야하나 매우 난감했던 평등과 정의를 위한 디자인 박사 ‘Doctoral student position in design for equality and social justice’ 였다.

당시 학교에서 올라왔던 평등과 사회정의를 위한 디자인 박사생 공고. 장학금 지원 박사 연구계획서 작성시 포지션 공고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너무도 당연하다.

평등, 사회정의, 디자인 이라니.. 지금이야 유럽에서 이러한 주제들에 지속적으로 노출이 되어와서 놀랍지도 않고 오히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주제가 되어서 늘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를 회상해보면 내가 너무 대한민국이라는 천박한 자본주의 시스템에 오래 귀속되어 있어서 그런 가, 이런 돈도 안될 것 같은 연구는 왜 하지 싶다가도, 이렇게 돈도 안되는데, 연구 주제로 정하고 무언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보려는 시도가 또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저렇게 애매모호한 주제의 연구계획서는 도저히 작성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디자인 주도의 헬스케어 공공분야 개발 박사로 지원했는데, 연구계획서를 쓰면서도 이건 떨어지겠다 싶었다.

일단 핀란드의 공공 헬스케어에 대한 리서치를 하고 이해 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컨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연구 계획을 작성하려고 하니, 급조된 느낌이 강했다. 추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디자인 대학에서 5명을 뽑는다는 공고였는데, 실제 선발된 인원은 3명이었고, 한명은 이미 알토대학교에서 박사과정에 있는 친구가, 다른 한명은 알토대학교에서 막 석사과정을 마쳐서 이미 해당 디자인과 교수님들과 안면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친구가, 그리고 나머지 한 명만 백그라운드가 알토와 무관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10월 중순이 데드라인이었는데 11월 15일 연구 시작하는 일정으로 진행하는 것도 이미 내정자를 두고 진행했던 프로세스였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정말 마음에 드는 후보가 있다면 일정이 수정될 수 있었겠지만, 비자발급에 최소 2-3개월이 걸리는 걸 생각하면 외국인은 채용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중요한 건 꺽이지 않는 마음.

그렇게 씁쓸한 상태로 겨울에 접어들어 추워지는 날씨만큼 좌절하고 있던 당시 근무하던 회사에서 실직 통보를 받았다. 박사가 더 간절해지고 있던 차에 우연히 검색 중 영국 랑카스터 대학교에서  IoT (사물인터넷, Internet of Things) 관련 디자인 연구할 박사생을 구한다는 공고를 발견하게 되었다. 2개 분야에 대해 각각 1명씩 찾고 있는데 학비는 전액 지원되면서  3.5년 동안 Stipend (생활비) 도 같이 지원되는 Design PhD Studentship이었다. 게다가 학교는 디자인 연구로 유명한 대학 중 하나인 랑카스터 대학교였고, 지도교수는 디자인 학계의 거물 교수님 이었던 것.

 

이건모 김건모.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 관심있다고 교수님께 메일을 보내고, 짧은 스카잎 인터뷰로 나의 존재를 알렸다 "교수님-저 한국에 있는 NON-EU학생인데 저도 학비지원 해당되나요?" "어, 되지. 관심있음 한번 지원해봐. 1월 말 까지야" 

 

오-! 왠 일-

 

당시만해도 영국이 유럽연합 공식 탈퇴 전이라 영국의 장학금이 나오는 박사과정은 대부분 영국시민이나 유럽 시민권자 학생들에게 국한되어 있는 것이 많아서, 나에게 그 기회가 돌아오는 것은 정말 희박한 확률이었다. 어쨌든 12월 말 퇴사준비를 하면서 1월 첫째 주 주말에 IELTS 시험 보고 1월 말까지 나머지 3주 동안 제출할 Proposal 을 준비했다. 

3주 동안 박사 연구 지원서 작성 제출

박사 학위 논문은 특정 분야에서 심도 깊은 연구를 통해 전문성을 입증하는 체계적인 글쓰기이다. 성공적인 박사학위는 내 주장이 기존 학자들이 쌓아놓은 이론에 기반하지만, 기존에 없는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고, 이 과정은 매우 과학적이고 실현 가능하다 라는 것을 증명해내야만 한다. 실제 박사를 진행해보지 않은 지원자들에게는 어느 정도가 박사과정에 적합한 scope이고 실현 가능한지 감을 잡기 어렵지만, 머리를 싸매고 고심해보면 어느 정도 구색은 맞출 수 있다. 랑카스터 대학교는 박사 지원서 포맷이 있었기 때문에 문서를 다운받아서 형식에 맞춰서 작성, 제출했다. 나는 지원 대학교, 교수님들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프로포절 작성에 있어서 지도교수님의 도움을 받지는 못했지만, 친분이 있는 박사 오빠와, 영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동생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프로포절을 제출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같은 프로젝트에 나와 같이 뽑힌 박사동료는 지도 교수님에게 먼저 지원해보라는 연락을 받았고, 프로포절 작성을 같이 했다고 들었다.) 몇 주 후 첫번째, 두번째 지도 교수님이 참여하는 인터뷰에 초대되었다. 30분 정도 진행된 인터뷰에서는 10분 정도 포트폴리오를 통해 자기소개를 진행하고, 나머지 20분 정도는 연구 프로포절 관련된 질문을 받았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구체적으로 기억은 안 나지만 질문들은 이를테면, 사물인터넷 디자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스스로 연구할만한 인재인지에 대해 확인하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교수님들께 깊은 인상을 준 느낌은 없었지만, 운이 좋았는지 인터뷰 본 바로 다음날 이메일로 합격 통보를 받았다.

공룡 프로젝트에 낀 박사생 나부랭이

내가 받은 학교 펀딩은 EPSRC (Engineering Physical Science Research Council) 의 지원을 받는 프로젝트 중 하나인 PETRAS와 Matching funding* 으로, 장학금의 출처는 EPSRC이지만 문서상으로는 학교에서 지원하는 박사 장학금이었다. 장학금은 3.5년 동안 매년 학비, 생활비 (Stipend) 와 기타 연구비 (£ 800) 를 포함하고 있었다. 생활비는 매월 £ 700 정도였는데 (2017년 기준), 이는 장학금에서 NON-UK/EU 시민에게 부여되는 더 높은 학비를 제외하느라 영국, 유럽 학생들이 받는 생활비의 반도 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때문에 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오퍼받았을 때에 부족한 생활비 부분은 Self-funding으로 하겠다는 확답을 요구 받았다. PETRAS는 영국에 있는 9개의 대학과 30여개의 기관으로 구성된 컨소시엄으로 사물인터넷과 관련된 5개 이슈 (프라이버시와 신뢰, 경제적 가치 창출, 안전과 보안, 수용성과 채택, 표준, 지배구조와 정책)와 관련한 연구를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진행하게 되는 프로젝트였다. 내가 진행해야 되는 연구는 경제적 가치창출과 연관이 있었는데, 프로젝트 기간 내에 연례 워크샵이나 세미나 참여 같은 활동을 통해 같은 컨소시엄에 있는 대학교 교수님들, 연구원들과 네트워킹 기회가 꽤 있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덜 고립된 연구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연구 초반에 IoT에 대한 이해를 위해 지도교수님께서 UCL, Lancaster University, University of Edinburgh 에 계신 다른 교수님들을 연결시켜 주시기도 하셨다. 일반적으로 프로젝트에 따라오는 박사 장학금을 받게 될 경우, 프로젝트에서 요구하는 KPI (핵심성과지표) 를 만족시켜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나의 경우 프로젝트 관련 업무를 해야 하는 부담은 없었다. 단지 교수님께서 페이퍼 퍼블리케이션에 대한 언급을 아주 종종 (박사를 시작한지 2개월 된 시점부터) 주셨으며, 연구 관련 모든 비용은 프로젝트에서 지원될 수 있게 해 주셨다. 이렇듯 지도교수님들은 내가 그저 박사 연구에만 오롯이 신경 쓸 수 있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PETRAS project의 5개 연구 테마

대학도시 랑카스터 적응기

학생 비자를 발급받고 7월 박사 시작일에 맞춰서 영국 만체스터로 입국해서 기차로 1시간 거리의 랑카스터에 도착했다. 작은 기차역 옆에 자리잡은 고풍스러운 랑카스터 성 (Castle) 이 아기자기한 영국 시골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랑카스터는 영국 북서지역에 있는 대학도시로 1000년 된 랑카스터 성과 작은 대성당이 있지만 (영국은 성당의 유무로 도시 자격이 결정된다) 5분 안에 시내를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은 지방도시이다. 랑카스터 도착 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 지도교수님과 미팅이 있어서 학교를 처음 방문했다. 영국에 몇 안되는 캠퍼스가 있는 학교였고, 캠퍼스의 끝과 끝이 1 km 거리로 꽤 큰 규모의 종합대학이었다. 디자인학과가 있는 Lancaster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 (LICA) 건물은 캠퍼스의 가장 북쪽 끝에 위치해 있었다. 디자인 학과는 다양한 디자인 분야 (Sustainability, Design fiction, Design management, Design policy, Urban design, Co-design 등) 를 연구하시는 Professors, Senior lecturers, Lecturer 들이 있어서 디자인 연구에 있어서 잘 알려져 있는 대학 중 하나이다. 

 

많은 디자인 연구자들에 둘러 쌓인 환경에서 연구에 대한 부담감, 설레임과 함께 마음 속 그 어딘 가에서 30대 중반에 아무도 없는 이 작은 시골도시에서 혼자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은 생전 처음 멘탈을 흔드는 또 다른 힘든 경험이었다. 집을 찾고, 생활이 어느정도 안정되어갈 때 가족도 친구도 없는 외딴 곳에서 혼자 살아가야 하는 외로움이 찾아왔다. 내가 조금 더 어릴 때 왔더라면, 내가 간 곳이 런던처럼 대도시였다면, 가족과 함께 왔다면, 이러한 가정들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첫 6개월 간 학교와 NHS의 mental health service 를 신청해서 상담도 받고, 힘들 때마다 런던에 가는 등 어쨌든 간에 이겨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좋은 친구들이 생기고 이러한 어려움은 많이 사그라들게 되었다. 

우연히 알게 된 또 다른 장학금 기회

2017년 7월 1일 박사를 시작한 후, 부족한 생활비 부분은 자비로 어느 정도 충당하고 있었지만, 박사 지원 조건 중 하나였던 내돈 쓰지 않기가 오롯이 충족되지 않아서 이 부분에 있어서 또 다른 장학금을 계속 알아보고 있었던 차였다. 동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가 계시는 박사님과 연이 닿아 연락을 종종하고 있었는데 그 박사님께서 RADMA (Research and Development Management Association) 라고 하는 영국 장학재단에서 주는 Doctoral Studies Programme 장학금을 추천해주셨다. 본인도 받으면서 공부하셨다고 하셔서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내용을 훑어 봤는데 지원자격이 너무나 너그러운 장학금으로, 기존에 장학금을 받는 사람도 중복 지원이 가능하고, 국적 불문 장학금 신청이 가능했다. 이 장학금은 R&D Management 박사 연구를 지원하려고 하는 사람 혹은, 지원 시점에 박사 과정을 이미 하고 있는 연구 역량이 뛰어난 학생에게 지원하는 펀딩으로 학비, 생활비와 각종 연구비 포함 연 최대 £ 22,264 (런던 외 지역) 이나 £ 24,263 (런던 지역) 를 지원해주고 있다(2023년 기준). 풀타임 박사생의 경우 최대 3년 동안 장학금 신청이 가능하고 매년 2월 말 지원 마감해서 7- 8월 사이 합격자 발표가 나는 일정이었다.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여러모로 조건이 부합하길래, 지도교수님께 말씀드리면서 이 장학금 지원해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냐 말씀드리니, "아- 내가 여기 Trustee 였는데, 내가 추천서 써주면 또 고려될 수도 있으니까 꼭 지원해라" 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셔서 축축하고 춥고 어두운 2월의  Northwest England 에서  박사 연구는 중단한 채 한달 동안 지원서 작성에만 열을 올렸다. 추가 장학금이 절실해서 주말 이틀을 모두 반납한 건 너무나 당연했다. 제출 서류는 CV, 지원서, 박사과정 합격증명서, 추천서 등이었다. 아마 기본 조건을 모두 충족했을 경우 (박사입학이 결정된 상황이라면) 장학금 수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문서는 지원서인데, 그 평가기준은 1) R&D management 에서 정한 연구 주제에 해당하는 연구일 것 2) 연구 프로포절과 방법론을 바탕으로, 지원서의 수준. 혁신 수준과 연구 수준 3) 수퍼바이저와 대학의 저명도 4) 지원자의 수준 5) 연구의 실무 연관도로 다섯가지가 있었다.

 

장학금을 지원받기 위한 연구는 RADMA가 정의하는 R&D Management의 네가지 주제 중 하나에 해당해야 했는데 아래와 같다. 

  1. Management of scientific and technological activity within firms and public bodies;
  2. Determinants of performance in research, development, product design and innovation;
  3. The interaction of organisation-wide processes such as strategy formulation and human resources with R&D;
  4. The relationship between organisation-level activities and performance, and national and regional innovation systems or technology, science and industrial policies.

 

네가지 주제 중 내 연구는 사물인터넷 신제품 개발 프로세스와 가치창출이라는 주제로 두번째 카테고리에 포함될 수 있었다. 지원서는 다섯가지 상위 항목 아래에 몇 몇 하위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세부 항목은 글자수나 페이지 수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으며, 이를 초과하여 작성할 경우 심사과정에서 탈락이 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1. Personal details: 지원자의 이름, 연락처, 및 기존 지원서 제출 여부 
  2. Details of University of institution where the doctoral programme will be undertaken: 박사학위를 진행할 대학교와 학과명, 주소, 수학 기간 
  3. Resources: RADMA에 요청하는 비용으로 각 년도 별로 얼마의 비용이 어디에 사용될 것 인지와 비용에 대한 당위성, 다른 장학금 수여 여부 
  4. Research Proposal: 박사 논문 제목, 연구 요약, 연구 질문과 문제, 연구 방법론과 디자인, 연구의 결과물 (수혜자와 실무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가져올 것인지) 
  5. Research support and environment: 논문 지도 방식, 윤리 문제, 연구 트레이닝과 지원, 연구 환경, 관리와 모니터링 

 

첫번째와 두번째 항목은 지원자와 대학교, 박사과정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기입하면 되는 것들이고 세번째부터 다섯번 째 항목인 Resources, Research Proposal, Research support and environment 를 전략적으로 작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먼저 Resources 와 관련해서 최대 3년까지 지원 가능했지만, 나는 1년차에 있었기 때문에 2년 지원이 가능했다. 다시 말하자면 영국의 박사는 3년 과정이 일반적이고, 4년차부터 Writing-up period로 들어가게 되는데, RADMA에서는 이 기간에는 장학금을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내 기준으로 최대 2년 신청이 가능했다. 모든 학비와 생활비는 첫번째 장학금에서 지원이 되었지만, NON-UK Citizen으로서 받고 있는 생활비가 충분하지 않아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는 주장과 더불어 데이터 컬렉션과 네트워킹 관련 추가 연구비가 필요하다는 부분을 강조했다. Research Proposal은 몇가지 하위 항목이 있는데, Research Questions/problem에는 연구 배경과 필요성, 단 학계와 업계의 관점 모두 고려해서 작성해야 했고, R&D management와 관련성, 그리고 이 주제가 왜 중요한가에 대한 내용을 1페이지 이내로 작성했다. 방대한 연구 배경에 대해 1페이지 안에 넣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작성 과정에서 인용된 페이퍼는 첨부하지 않고 따로 ‘Reference can be provided on request’로 생략했다. 

 

Research methodology and research design은 어떤 연구 접근방법을 사용할 것인지, 왜 이 접근방법이 연구 질문을 답하는 데에 적합한 것인지, 어디에서 현장연구 (Fieldwork)가 수반될 것인지, 해당 현장 연구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정당성 설명, 그리고 연구에 산업협력이나 스폰서십이 포함 되어있는지 등의 내용을 포함해서 1페이지 이내로 작성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연구를 통해 무엇을 달성하려고 하는지, 주요 수혜자가 누구이며, 연구결과를 어떻게 확산시킬 것인지 등에 대해 반페이지 이내로 Outputs에 대한 작성이 필요했다. 다섯 번째 항목인 Research support and environment는 주로 연구 관리, 행정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학과에서 논문 지도가 어떻게 이루어 지고 관리되고 있는가, 연구와 관련하여 윤리적 문제는 없는지 만약 있다면 학교 정책이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 성공적인 연구완료를 위해 트레이닝 필요성이 어떻게 포착되고, 충족되고 모니터 될 것인지. 연구 과정이 어떻게 관리되고 평가될 것인지, 해당 연구주제 관련하여 대학교의 연구 환경이 얼마나 잘 뒷받침해줄 것인지, 학과가 이 장학금을 어떻게 관리하고 모니터해 줄 것인지에 대해 촘촘한 작성이 요구되었다.  

 

RADMA Doctoral Studies는 인터뷰 없이 제출 서류만 있어서 2월 말 지원 완료하고, 잊고 지내다가 결과 발표되는 7월 들어 계속 마음조리고 있었던 차에 반가운 어워드 레터를 받았다. 오퍼를 수락하는 조건은 1) 5년안에 박사를 끝내지 못할 경우 비용을 뱉어내야 한다 2) 페이퍼 낼 때마다 Acknowledgements 란에 RADMA 장학금 받고 공부했다고 명시해야 한다 3) 재단 홈페이지에 이름이랑 소개 글 올린다 4) 필수는 아니지만, 장학금 재단이 가지고 있는 저널이랑 컨퍼런스에 페이퍼 내야 한다 등이었다. RADMA Doctoral scholarship은 최대  3년 까지 매년 20,109 파운드 지원이 가능 (2022년 기준 한화로 3200만원) 한 펀딩으로 첫해는 선불로 학과를 통해 지원해주고, 이듬해부터는 연간 리포트를 검토하여 조건부로 지원을 해준다. 지원 시 몇가지 평가기준에 부합되어야 하고, 선발 기준에 맞는 전략적인 지원서 작성이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재단의 Trustee 였던 지도교수님의 명성이 큰 역할을 해 주신 것 같다. 

반가웠던 장학금 합격 이메일

장학금을 받으면 무엇이 좋은가

지원하다 보니 영국 박사과정동안 운 좋게도 박사 장학금을 2개나 받게 되었다. 하나는 박사 지원할 때에 조건이었던 EPSRC에서 나온 펀딩 7만2천 파운드 (Tuition fee + Stipend + Research Activities Budget) 와 나머지 하나는 박사 시작 후 6개월 된 시점에 지원하고 받은 영국 기관에서 나온 펀딩 1만7천 파운드. 학비 + 연구비 + 생활비로 받은 펀딩을 합산해보니 대략 1억 4천 (9만 파운드*) 였다 (2017년 입학 당시 학비 산정 기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박사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장학금을 받고 박사를 하게 되면 그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했는데, 먼저 본인의 연구 계획서 작성 역량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는 부분에 있어서 의미가 크다. 물론 연구 계획서와 연구 질문은 박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여러 번 바뀔 수 있지만 말이다. 박사 연구 계획서나 프로젝트 계획서는 연구를 왜 해야 하고, 어떻게 진행할 것이며, 이러한 결과는 이러한 의미가 있다는 걸 미리 이야기하는 일종의 3년 연구 대장정에 대한  blueprint인데, 이러한 문서를 잘 쓴다는 것은 아카데미아에 있는다면 앞으로 무수히 작성하게 될 research grant application에 대한 연습이기도 하므로, 연구자로서 본인을 훈련시키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와 함께 나의 CV에 장학금 수여에 대한 한 줄이 추가된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사실 영국에서 박사를 하는 영국, 유럽 친구들은 펀딩을 받고 하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 같은 Non-UK Citizen이 받는 것과 의미가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그래도 펀딩을 받고 박사를 했다는 것은 박사 이후 포지션 이동 시 advantage로 작용할 수 있다. 실제로 현재 근무하고 있는 Exeter 대학교의 포닥 포지션에 지원했을 때에 인터뷰어가 본인이 RADMA Trustee인데 ‘너 RADMA 장학생이더라’며 언급했었다. 더불어 박사과정 중 경제적 측면에서 걱정을 안 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큰 위안이 된다. 영국 박사과정은 최소 3년이지만, 길어지게 되면 4년에서 5년 까지도 될 수 있는데, 4천만원이 넘는 학비와 추가 생활비를 매년 부담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나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펀딩이 주요 기준이라면, 학교, 지도교수님, 시작 시기 등에 있어 유연하게 생각하는 것도 추천한다. 물론 연구 분야가 잘 맞아야 하겠지만, 기존 생각했던 학교 뿐 만 아니라 범위를 더 넓혀서 알아보는 것이 펀딩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높아질 수 있다. (findaphd.com에서 수시로 관심분야 박사 장학금 공고가 올라오는지 참고)

 

한국 국적자인 Non-UK citizen이 영국에서 펀딩을 받고 박사를 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많이들 알려져 있지만, UKRI, AHRC, EPSRC, ESRC 등 연구기관의 홈페이지에 International 학생이 펀딩을 받을 수 있다 라고 공공연하게 명시되어 있으며, 나 포함 꽤 여러 명이 다양한 소스에 해당하는 펀딩을 받고 박사를 한 케이스를 보아왔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은 아니며, 도전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럽 진출을 희망하는 후배 연구자들에게 응원의 메세지

박사과정 첫째 날 따뜻한 나무 내장재의 오픈 된 사무실 공간을 처음 방문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디자인 도서와 저널, 컨퍼런스 페이퍼에서 이름으로만 만나던 지도교수님을 처음 만나 뵈었을 때, 교수님의 따뜻한 웰컴에 떨리는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이었던 느낌도 아직까지 생생하다. 이러한 설레는 느낌은 박사과정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면 증후군 (Imposter syndrome)으로 바뀌면서 박사과정을 쉽지만은 않게 했지만, 학과에 늘 각자의 디자인 분야에서 연구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면서 늘 자극 받으며 앞만 보고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모두의 박사과정이 다 다르고, 정답은 없다는 것을 알지만, 개인의 경험으로 비추어 봤을 때 박사과정 중에 research assistant 나, post-doctoral research associate 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망설임 없이 프로젝트에 조인했던 것이 박사과정을 지연시키기는 했지만, 이후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박사 후 엑시터 대학교에서 포닥을 하면서 지원했던 렉처러 포지션 두군데 (University of Edinburgh, University of Exeter) 에서 오퍼를 받고 현재 엑시터 대학교 비즈니스 스쿨에 디자인 혁신 렉처러로 근무 중이다. 장학금이 있는 디자인 박사과정을 찾고, 지원을 준비하는 것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한다면 너무나 가능하다는 것도 잘 안다. 디자인 연구에 뜻이 있다면, 다양한 디자인 분야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연구 방법과 연구 주제를 탐구하는 영국내 너무 많은 디자인 학자분들과 함께 장학금이 지원되는 박사 여정을 시작 해보는 것을 추천드리는 바이다. 

번외 I: 장학금 흑역사

2월 말 RADMA 장학금을 지원하고 결과를 기다리던 중에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Cumberland Lodge Scholarship 이라는  또 다른 장학금도 4월에 지원을 했었다. 이 장학금은 매년 10명 에게 연 300£를 지원하지만, 수여를 하게 되면 버킹엄궁에 초대되기도 하고 여왕님과 사진도 찍는 상당히 영예로운 장학금이었다. 영국 내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진행하는 학생들이라면 연구주제와 상관없이 모두 지원할 수 있는 장학금으로 2년 간 지원을 받게 된다. 장학금은 대중참여, 학제간 연구,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으로, RADMA와 다른 점은 지원 기간 2년 동안 학생이 이러한 스킬을 갖출 수 있도록 멘토링과 트레이닝, 그리고 네트워킹 기회가 적극 지원된다는 점이었다. 대신 지원을 받는 동안 연 2회의 컨퍼런스 참여가 요구되었고, 블로그와 뉴스레터에 컨퍼런스 참여 후기 글을 올려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지원서 작성은 RADMA에 비해 상당히 간결했으나, 펀딩의 목적에 맞는 내용 작성이 요구되었다. 이를테면, 연구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 현 사회가 마주한 가장 중요한 윤리적 이슈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 300를 연구 역량을 개발하기 위해 어떻게 사용할지 등에 대해 작성해야 했다. 사물인터넷 디자인 프로세스를 연구하는 박사생으로 최대한 장학금 목적에 맞춰서 신청서를 작성하고 제출했지만, 한계가 있었는지 실패로 끝나버렸던 흑역사였다. 

* 위 내용은 곧 출간될 ‘슬기로운 영국 유학 생활 (이보연 외 6인)’ 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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